5-6월 일기 : 몸 이야기, 연구비 이야기.

정신을 앞서 나가는 몸.

5-6월에는 강의를 마무리하고, 학기를 맺기 위한 일들(평가와 점수 정리)을 하고.. 사이사이에 논문 투고도 하고 학위 논문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학위 논문은 차곡차곡 분량을 채워가고 있고, 동시에 앞부분에 대한 수정작업도 조금씩 하고 있는데, 여전히 쓸 내용이 많다..(7월 중순인 지금… 1.3 챕터? 정도 더 써야 함 ㅠㅠ) 쓰지 않은 장은 개요는 있지만 내용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스스로의 연구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가장 짙어지는 시기가 보통 졸업 심사 학기 직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서 갑자기 지금의 루틴을 획기적으로 바꿔서 연구할 시간을 더 내고… 새벽 시간도 활용해서 연구하지 않는다. 물론 진짜 급할 때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조급한 마음, 의심, 불안을 달래기에는 원래 있던 루틴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루틴을 만들려다가 마음만큼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보면서 실망과 좌절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삶의 어느 시점부터는 정신의 힘으로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고, 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이 생각과 관련된 재미난 책을 한 권 읽었다. 제목은 몸은 제멋대로 한다: ‘할 수 있다’의 과학으로 일본의 미학자인 이토 아사가 저술하고 김영현이 옮겼다. 이 책은 기술의 힘을 빌려서 의식이 생각하거나 상상하지 못하는 몸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몸이 의식에 앞서서 만들어낸 움직임을 바탕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다양한 연구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운동에서 ‘이렇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라는 움직임의 공식 바깥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몸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안정적인 움직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야구 선수에게 똑같은 자세로 공을 던져달라고 요청해도, 투구 위치나 몸이 내려가는 각도가 매번 달라졌다. 게다가 선수 본인도 그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본인은 매번 같은 감각으로 공을 던졌고, 공은 정확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향했지만, 그의 몸은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움직임을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마구 흔들렸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특정한 공식에 맞춰서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연습이 오히려 운동을 배우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에만 골몰한다면 오히려 나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반응하지 못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책에는 기술의 보조를 통해서 신체를 쓰는 방식을 배우는 다양한 사례들이 제시된다. 탁구공이 떨어질 위치, 탁구공의 회전 방향, 탁구공이 날아오는 궤적을 표시해 주는 가상공간에서 실시간 코칭을 받으면서 탁구 기술을 배우는 것, 뇌의 가소성을 바탕으로 (화면 속에 있는) ‘꼬리를 움직이는 능력’을 배우는 경우 등도 흥미로운 사례였다.

책에 나온 연구 사례들은 내가 기술을 통해서 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폭이 현저히 좁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지만, 운동에 대한 경험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제공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에는 어떤 공식에 따라서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피드백은 있지만 피드백에 따라서 내 몸을 움직이는데 신경 쓰기보다는 피드백에 따라서 몸을 움직였을 때의 감각을 느끼는 것에 주의한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내가 움직임을 통해서 재현한다고 믿는 이 감각조차도 사실은 정확하게 같은 움직임으로 재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운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강습을 빠지지 않고 나가면서 사람이 많은 조건, 사람이 적은 조건, 피곤한 조건, 덜 피곤한 조건, 해가 쨍쨍한 조건, 그렇지 않은 조건 등을 다양하게 내 몸이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반복을 지루해하지 않고 잘하고 있다.) 몸이 나의 의식을 앞서서 세상과 맞서는 법을 배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대견한 생각도 들었고, 앞으로 내 몸을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비와 연구하는 삶

이번 7-8월은 내가 연구재단을 통해서 연구비 지원을 받는 마지막 두 달이기도 하다. 2년 전에 운이 좋게도 박사과정생 연구장려금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그동안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연구비가 있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강의나 일을 과도하게 늘리지 않으면서, 학위논문을 위한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고, 출판하고, 때때로 하고 싶은 일(ex. 독서 모임 조직과 행사 기획 등..)에 시간을 쓰면서 살 수 있었다. 일을 덜 해도 되니 운동을 삶의 루틴으로 포함할 여유도 생겼고, 긴급한 상황에 쓸 돈을 모을 수도 있었다. 다양한 책을 사서 읽고, 제철 과일과 채소를 사서 요리해 먹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고, 후원이 필요한 단체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을 보탤 수 있었다. 연구비란 좁은 의미에서는 연구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ex. 실험 기자재 구입비, 연구에 필요한 도서 구입비, 인터뷰 대상자에게 주는 사례비 등)을 의미하지만, 나한테 연구비는 강의 등 학교에서 하는 노동만으로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형태로 ‘연구하는 삶’을 꾸려 가는데 필요한 돈이다.

하지만 이제 연구비 지원도 끝이 난다. 원래 계획은 저번 학기에 심사받고 연구비가 종료됨과 동시에 졸업을 하는 것이었는데, 올해 초에 피드백받으면서 수정할 부분이 많아져서 하지 못했다. 계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걸 위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내 삶과 일상의 리듬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논문 수정 작업이랑 발표, 기타 여러 일의 균형추를 유지하는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유일한 문제는 9월부터는 수입의 대략 절반 정도가 사라지는 상황이라는 점일 뿐... 물론 계획대로 졸업을 했어도 누가 졸업 축하한다고 돈 주는 것도 아니고 돈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인지 졸업을 못했다는 것이 찜찜하긴 하지만 ‘그렇게 까지 마음을 쓸 일인가..’의 마인드이다. (이 마인드와 별개로 졸업은 너무 하고 싶음.)

나는 보통 한 수입원이 사라지면 그만큼의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일을 찾는다. 하지만 졸업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다른 일을 구하고 시작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냥 연구비 포함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면서 모아놓았던 비상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살려고 한다. 사실 비상금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으니까, 연구비 지원이 곧 끝난다는 것도, 졸업을 저번 학기에 못한다는 점도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연구자 공제회, 독립의 환상

하지만 연구자가 비상금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운 좋게 연구장려금에 선정되었고, 그 외에도 학교에서 수업조교, 근로장학생 등 몇 가지 일을 할 기회가 있어서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가 모든 대학원생과 연구자에게 열려있지 않다. 학교의 일자리는 교내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학교가 예산 편성을 어떻게 하는지에 내 자리가 따라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고, 수업 조교는 어떤 수업에 배정되느냐에 따라서 업무가 학기 단위로 크게 바뀔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 시선 때문에 정해진 장소에 나와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해도 ‘이 일을 통해서 생계를 해결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장학금을 받는 학생’으로 인식된다는 점이 가장 좋지 않은 점이다.

나는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동안 내가 일했던 부서에 대한 양가 감정을 느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고, 부서의 직원 선생님도 대학원 생활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연구와 일, 육아를 병행하는 대학원생들의 사정을 헤아려 주는 좋은 분이었다. 다만 내가 이 부서에서 담당하는 일의 전문성에 비해서 지나치게 적은 돈을 받았다는 점, 그 적은 비용과 관련해서 상급자와 임금 협상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일하는 환경에 대한 의견을 모두 직원 선생님을 통해서 전달해야 했다는 점(이것도 교직원이 얼마나 근로장학생의 근무 환경 개선에 호의적인지에 달려있음...)은 ‘이 자리가 정말로 좋은 일자리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나를 끊임없이 밀어 넣었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 공제회의 출범 소식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작년에 프리랜서 공제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야기 들으면서 연구자 대상으로도 긴급대출이나 건강검진 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제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연구자 공제회가 생기다니!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추진 위원으로 기금 약정을 했고 입금했다. (관련 칼럼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07720.html, https://campaigns.do/discussions/2837 / 연구자 공제회 추진위원 가입 링크 🔗 :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hOcVH5QFw3-ooUzDZ2W_tjN7-NdD45s3SZ5rGQx6Ox5BsIg/viewform)

요즘 7월의 책모임을 준비하면서 에바 키테이의 의존을 배우다』(김준혁 역)를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혼자만의 능력으로 삶을 영위해 간다는 생각,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허상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혼자서 밥을 차려먹는 것보다 각자 반찬을 가져와서 같이 밥을 차려먹는 것이 식비도 절약 되고, 준비하는 품도 덜 들고, 밥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누군가와 같이 살면, 냉난방 효율이 별로 좋지 않은 원룸보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더 큰 집에서 사는 선택지를 상상할 수 있다. 설령 내가 혼자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좋은 집에서 살고, 요리나 청소를 해줄 사람을 고용한다고 한들, 나는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일상의 돌봄에 필요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평소에도 건물의 청소노동자, 미화원, 배달 노동자, 내 먹거리의 생산을 책임지는 농민 등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거나 일시적인 병으로 스스로를 챙기거나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졌을 때는 먹고 입는 것에도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다만 돌봄 노동이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가 됨에 따라서 내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은 가려지고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버는 능력’만 주목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산다는 허상이 만들어진다.

이야기로 잠시 다른 길로 새긴 했지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가족, 친구, 애인에게 의존하든 혹은 연구자 공제회나 대학원생 노조 같은 사회적인 네트워크에 의존하든 ‘나를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상태에 놓는 것’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더 다양한 삶의 선택지를 상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잘 의존하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에게 받기만 하는 것이 때때로 어색하기도 하고, 내가 마음을 준 것만큼 상응하는 무언가가 오지 않았을 때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의존의 영역에서는 계산적인 일대일의 주고받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이 관계에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서로가 필요한 것, 관심 갖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각자에게 중요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조율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6월에 다녀왔던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이번 해 6월에도 무주 산골 영화제와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사진은 DMZ) 영화제도, 페스티벌도 내가 기댈 수 있는 친구 덕분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친구야 내년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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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월 일기 : 건강 관리, 학술대회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