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월 일기 : 글짓기와 살기

9월부터 지금까지 학위논문 심사를 위한 마감을 두 어번 거쳤고 논문 공개심사도 받았다. 논문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분량도 많이 줄었고, 중언부언하는 문장도 많이 제거했다. 심사 학기의 하루하루는 마감 일정을 챙기면서 남은 시간을 고려해서 가능한 수정의 범위를 조정하는 것, 이미 쓴 내용을 지웠다 붙였다 단락의 순서를 조정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 어떻게 쓸지 생각나지 않아서 답답하지만 마감이 코앞이니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상태를 견디는 것, 마감 기한 안에 수정하지 못한 부분은 어떻게 수정할지 고민하면서 보내는 것, 때때로 각성 상태 속에서 깨어 있다가 두통과 함께 잠드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 질문은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애써 답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 결국 자기부정에 이르게 된다.

10월 중순부터 강의가 있어서 논문을 마감하는 기간 동안 광주에 가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광주의 친구 집에 포터블 모니터를 들고 가서 논문을 썼다. 서울에서 해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상의 활동을 공유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친구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빠진 나의 징징거림을 받아주고, 저녁으로 뭘 먹을지 혼자서 고민하지 않게 해 주었고, 때때로 알아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고, 논문이 빠진 교착상태와 상관없이 자신의 하루를 잘 살아갔다. 논문이 지지 부진해도 아무튼 밥은 먹어야 했기에, 바쁜 와중에도 괜찮은 음식을 다양하게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혼자서만 밥을 해 먹었다면, 최소한의 재료와 에너지를 들여서 빨리 해먹을 수 있는 똑같은 요리만 매번 먹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삶은 일상을 더 버틸만하게 만들고, 또 다채롭게 해 준다.

아직 마감이 두 번가량 더 남아있다. 광주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와서 무너졌던 루틴을 세운다. 수영 강습을 가고, 곧 있을 이사를 위해서 짐 정리를 하고, 냉장고에 있는 오래된 식재료를 얼른 요리해서 먹고, 빈 냉장고를 다시 채소와 과일로 채운다. 오랫동안 모은 커피박을 갖다주고 빈 로션통을 채우러 알맹상점도 방문한다. 저녁은 또 냉장고를 털어서 먹는다. 하루 종일 돌보는 일을 하다 보니 몸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런 활동 속에서 내가 삶과 연결되어 있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영 쉘든>은 <빅뱅 이론>의 쉘든 쿠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인데, 나는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쉘든이 학교에서 겪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 관계의 현실적인 역학도 재미있지만, 더 마음에 드는 부분은 쉘든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그의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 생기면서 쉘든의 서사는 뒷전으로 만들어버리는 과감한 전개이다. <영 쉘든>의 후반 시즌, 특히 시즌5부터 시즌7까지의 주인공은 쉘든이 아니라 주변의 인물들이다. 쉘든은 대학교를 다니면서 학술계에서 인정받을 커리어를 만들고 교육 과정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일을 지속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커리어를 만드는 쉘든을 주인공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외로움, 10대 일탈, 10대 임신, 결혼, 양육이 후반 시즌의 서사를 촘촘히 채우고, 쉘든의 학계 소식과 대학 생활은 ‘쉘든은 지금 뭐 하나?’같은 생각이 들 때쯤 등장한다. 그래서 그 시리즈를 보고 있다 보면, 결국 쉘든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계 커리어 만들기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와중에 선택할 수 있는 일과 중 하나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지만, 연구자로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시즌5 에피소드 3 “위치 에너지, 공원 벤치에서 마시는 술”이다. 이론 물리학 박사이자 쉘든의 멘토인 스터지스 박사는 연구활동을 그만둔 후 마트 일을 시작한다. 매대에 물건을 진열하고, 가격표를 붙이고, 계산대에서 물건을 포장한다. 쉘든은 스터지스 박사가 자신의 잠재력을 쓸모없는 일에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그는 학문의 쳇바퀴(Academic Hamsterwheel)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마트에서 손에 잡히는 성취(Tangible Achievement)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연구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연구를 통해서 뭔가 성취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고, 더 나아가 이 방향이 맞는지 내가 뭔가 이 업계에서 뭔가를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디에 기여할지 명확하게 그리기도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스터지스 박사가 마트 일을 ‘손에 잡히는 성취’라고 하는 것은 단지 마트에서 하는 일이 하기가 쉽고, 그래서 더 빨리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일은 마트를 돌아가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마트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찾고 식사를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마트에서 나오는 신나는 음악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 물론 스터지스 박사가 마트에서 하는 노동은 밭에서 식탁에 이르는 삶의 연쇄 속에서 이해되지 않고, ‘가격표 붙이기’, ‘물건 포장’ 같은 과업 단위로 평가되기 때문에, 이 노동이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스터지스 박사가 자신의 일로부터 느꼈던 소외감을 왜 마트 일에서는 덜 느꼈는지는 이해가 갔다. 그 일이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이어지는 삶의 연쇄 속에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밥을 해먹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루틴을 만드는 것은 단지 내가 다른 영역에서 무언가를 더 생산하기 위한 발판이기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일정한 루틴 속에서 이어지는 하루하루라고 해도 작업의 진도는 더딜 수 있고, 지지부진할 수 있고, 망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여러 방식으로든 잘 안될 수 있다. 루틴은 작업 생산성을 위한 부스터가 아니라 그냥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책모임 가는 길에 찍은 사진.

<다달> 책모임도 1년 가까이 해왔는데,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읽은 책에 대해서 결이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이렇게만 요약될 수 없긴 하지만..)

나는 성격이 냉담하고 사람들과 연결되기를 꺼리는 편인데, 이 모임을 다녀오고 나면 , 사람들과 잘 지내는 자아를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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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월 일기 : 마감, 읽고 정리하기, 여름 휴가